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 회담 (문단 편집) === 미중 사전 교섭 === 루스벨트가 장제스를 직접 만나고 싶어한 것은 카이로 회담이 시작되기 전으로 거슬러올라갔다. 1942년 10월 26일 루스벨트는 쑹메이링을 미국으로 초청하면서 장제스의 방문도 희망한다고 전했다. 11월 16일 장제스는 쑹메이링을 자신과 만나는 것처럼 만나 솔직담백하게 외교문제를 논의해 달라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1943년 5월 19일 미국을 방문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미국 국회 연설에서 루스벨트와 함께 스탈린, 장제스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연합국 수뇌들 간의 회담 가능성이 차차 점쳐지기 시작했다. 1943년 6월 4일 루스벨트는 쑹쯔원 외교부장과 버마작전에 관한 회의를 하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연합국 4대 강국 회의를 할 것을 제의했고 이에 앞서 장제스와 단독으로 회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제스는 이에 대해 상당히 만족스러워했지만 6월 7일의 전보를 통해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 이는 아직까지 일본과 완전히 결렬하지 않은 스탈린을 만나는 것이 껄끄러웠을 뿐더러 지금껏 미국과의 외교를 쑹쯔원과 쑹메이링에게 의존해온 터라 자료가 부족하여 미국의 의도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3년 6월 30일 루스벨트는 중국국민정부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 장제스 앞으로 직접 전보를 보내 '이번 가을'에 만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면서 '두 나라 수도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다. 장제스는 7월 4일에 이 전보를 받았고 귀국한 쑹메이링에게서 상세한 보고를 받음으로 미국의 의도에 대해 확신하여 7월 8일 루스벨트의 회담 요청을 수락하기에 이른다. 7월 8일 장제스는 '9월 이후'에 만나면 좋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제안을 보냈고 회담을 앞당길 필요가 있을 때에는 중국 측이 중국을 떠나기 2주 전에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7월 21일 장제스는 쑹쯔원에게 전보를 보내 '9월 이후'가 적합하다고 한 기존 입장을 번복하진 않겠으나 만약 루스벨트가 8월과 9월 사이에 회담할 계획이 있다면 이를 15일 전에만 알려주면 수용할 수 있다고 함과 동시에 알래스카에서 회담하자고 한 제의를 거부했다. 이는 알래스카에 가기 위해서는 시베리아를 경유해야 하는데 스탈린과 미리 만날 약속을 하지 않고 소련을 경유하는 것은 '국제간에 불리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제스의 의도를 쑹쯔원은 해리 홉킨스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에게 전달했다. 1943년 8월 14일부터 8월 24일에 걸친 퀘벡 회담이 열리자 홉킨스는 쑹쯔원에게 "만약 대통령이 아프리카로 가서 위원장과 회담을 못하게 되면 위원장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회담할 수 있느냐"라고 문의했다. 장제스는 8월 21일 전보를 통해 '대국적으로 이로울 것이 없으며 손해를 입는 것'이라는 이유로 완곡히 거절했으며 루스벨트와 이미 아프리카에서 회담하기로 결정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10월 13일 루스벨트는 특사 [[패트릭 헐리]]를 파견하여 장제스에게 '중국과 영국은 동아시아에 관한 자신들의 의견을 밝히고 자신들의 정책을 토론에 부칠 수 있다. 미국은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큰 감동을 받아 루스벨트를 '성실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며 '기사도와 고귀함이 숭고함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칭송했다. 이와 별개로 장제스는 소련의 태도를 문제삼으면서 소련이 장기적으로 중국의 적화와 병탄을 기도하여 경계심을 풀 수 없다며 이를 루스벨트에게 전달해 달라고 헐리에게 요청했다. 헐리는 스탈린이 이미 세계적화라는 기본정책을 포기했다면서 장제스를 안심시키려 했다. 헐리는 6시간 동안 장제스와 회담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고했다. ||<(> 1. 장 주석과 중국 인민은 민주, 자유라는 원칙에 찬동하고 있다. 1. 장 주석과 중국 인민은 공산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1. 장 주석은 루스벨트는 당연히 민주와 자유에 찬동하고 있으나 연합작전을 위해서는 잠정적으로 제국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와도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다. 1. 장 주석은 장래의 연합국의 합작과 단결은 서로 다른 사상을 지닌 국가를 함께 이끌고 나갈 루스벨트의 능력에 달려 있으며 루스벨트는 자유로운 활동 속에서 4강이 일치하여 동의할 원칙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 한편 스탈린과의 교섭에 실패한 루스벨트는 10월 28일 장제스에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11월 20일에서 11월 25일 사이에 만나자고 통보했으며 10월 30일 처칠과의 논의 끝에 장제스에게 다시 전보를 보내 11월 26일 카이로 근처에서 처칠과 만날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11월 1일에 전보를 받은 장제스는 11월 2일 답전을 보내 이를 수락했다. 이 시기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미영소 3국 외상회담에서 미국은 중국 대표가 포함된 3국 선언이 발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중국을 기쁘게 했고 덕분에 미영중 3국 회담의 논의는 더욱 급진전되었다. 1943년 11월 8일 루스벨트가 회담 일정을 최종 통보하였다. 장제스에게 자신이 2~3일 안에 북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며 11월 22일 카이로에서 처칠과 함께 만날 것을 제안했고 자신이 스탈린과는 별개로 만날 것도 알렸는데 장제스는 11월 9일 답전으로 스탈린보다 자신을 먼저 만나 달라고 요구했다. 11월 10일에 루스벨트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